[정명희의 문학광장] 대자연의 녹즙에 마음을 담그니 외로움도 멈추더라

2024-07-04     정명희 경기문학인협회장·경기산림문학회장
정명희 시인, 수필가 경기문학인협회장/경기산림문학회장

미리 온 우기의 계절, 방송에선 장마가 왔다고 일기예보를 안내장 들이밀 듯 시간마다 송출하고 있다. 몇 년 전 양평으로 간 한 시인의 집이 넘쳐나는 도랑물에 아수라장이 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덕지덕지 붙은 황톳물과 방인지 마당인지 구별도 안 되게 침대만 빼고 모든 것이 얽혀 뒤섞여진 참담함을 경험한 그녀를 생각하면 수시로 울컥하는 출렁임이 세찬 파도보다 더 한 따갑고도 매운 맛을 경험한다. 전화를 걸 때마다 먼저 물어 보는 것이 집은 어떻게 제자리를 찾아 가느냐는 것이었는데 아마도 두어 달은 족히 걸려 간신히 원상 복구 되었던 것 같다. 
  
양평으로 이사 가며 제일 자랑스럽고 뿌듯하게 생각하는 것은 야생초를 마당에 기르며 꽃 보는 일에 심취한 그녀의 마음을 읽는 일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꽃들이 피어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지난 봄은 꽃들에 휩싸여 있지요. 양평으로 들어 간 일이 너무 행복해졌어요. 그리곤 그녀는 마을사람들을 조금씩 사귀기 시작했다. 그 들 중에 말도 안되는 특별한 성향의 사람들을 지인으로 깍듯이 모시는 것은 혀를 찰 정도로 감탄사의 연발이었다. 
소리를 질러도, 아무 말이나 해 대도, 그저 그러려니 속마음을 어찌나 다독거리며 어루만지는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엇하나 챙기지 못하는 내게도 그녀는 한결같이 자기를 내려 놓으며 챙긴다. 
차가 막혀 최소 서너 시간이 걸려야 오는 길을, 양심도 없이 불러내면 한 번도 마다하지 않고 보고 싶어 왔다며 기꺼이 와 주는 그녀. 
저녁까지 챙겨 먹이고 차까지 함께 하며 끝까지 남아 밤 12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를 보면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애틋한 심정이 줄을 이었다.   
매사에 그러는 그녀에게 날이 갈수록 존경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남들이 잘 모르는 인생살이 매운 맛을 감당하며 그녀는 늘 겸손한 자세로 행한다. 그런 질곡의 삶속에서 수많은 마음 수련을 한 탓일까. 작은 부분에서도 사랑의 행동을 솔선하여 보여주는 살아있는 성자같은 그녀가 사랑스럽다. 
 
얼마 전 그런 그녀를 뜻하지 않게 울리고 말았다. 엉엉 소리를 내며 우는 그녀를 보며 찢어질 것 같이 아파오는 내 심정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차라리 이 세상에서 내 스스로 없어졌으면 하는 자괴감까지 들었다. 나는 무엇인가. 과연 내가 한 일은 주위로부터 질타를 받아야만 하는 중죄였을까. 뭇사람들의 혼란스러웠던 오해와 질타, 공격이 내게 몰려 왔을 때 그녀의 오열은 너무나 괴로운 형벌이요. 막달라마리아의 돌팔매질이었다. 왜 내가 그렇듯 아름다운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인지 몇 개월이 지난 지금에도 자괴감이 든다.
또 다시 장마의 계절, 그녀가 최고의 보양제를 들고 내게로 온다고 한다. 비는 벌써부터 심상찮게 뿌려대는데, 문득 그녀의 집은 안전한지 하루 종일 전전긍긍하고 있다. 또 지난번처럼 물 폭탄이 그녀의 집에 오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까. 그녀를 가까이 하는 지인은 산꼭대기 언덕에 펜션과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그 날 물 사태가 난 그녀의 집을 바라보며 그 지인 또한 얼마나 가슴조려 했던지. 화는 그녀의 남편에게로 돌아갔다. 저리도 아름답고 고운 천사를 왜 그런 허접하고 고생스런 흙밭에 빠져들게 했느냐는 것이다. 
주위사람들이 아무리 미워해도 그녀는 그와 함께 살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다.
 
한심스런 그녀의 남편은 그 후에도 정신 불안감에 빠져 이제는 멀리 집 밖으로도 못 나가게 한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회를 풀려 해도 찾아가야만 한다. 그런데 그녀가 온다고 한다. 밥까지 해서 들고 온다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며칠 전 먼 시골에 행사가 있어 다녀왔다. 그 곳은 십 여 년 전부터 오라고 몇 번이고 했지만 바쁜 일로 가지 못했던 곳이었다. 마음이 심란한 것이 가라앉지 않아 전전긍긍하는데 행사초대는 반가웠고 한 번은 떠나고 싶은 여행이었다. 

그 여행은 축복처럼 하늘이 내게 주신 위로의 선물이었다고나 할까.
몇 십 리를 가는 데도 초록물결은 멈추지 않았고 길가의 나무들은 어쩌면 공손히도 그린터널을 만들며 환상의 파노라마를 펼쳐 주는지. 끊임없이 경탄의 소리를 연발하게 만들어 주었다. 
칠십사 년이 된 전쟁의 흔적도 녹음은 덮어 주었다. 초록의 손들이 내 어깨를 어루만지고 보잘 것 없는 내 작은 가슴을 쓰다듬으며 그 보다 더 한 일을 겪은 그 고장의 모습을 보며 마음을 정화하라는 듯 했다.              
그 곳에서의 일박이일은 초록이라는 대자연의 겸허함과 넉넉함 속에서 삶은 그 누구도 손가락질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스러져간 전쟁 속의 아버지 오빠 언니 형들의 영혼 앞에 내가 겪은 아픔은 그야말로 아픔이 아니었음을 절감하게 해주는 일이었기 때문에.    

싱그런 녹음 속에 마을의 전쟁영웅들 발자취를 따라가며 마음을 담그니, 이 또한 사람이 되라는 진정한 하늘의 계시였음을 깨닫게 하는 순간이었다. 슬픔도 외로움도 고통도 받아들이는 진정한 마음이야말로 세상을 지키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아로새기는 푸른 녹즙의 여행이었다. 
 
오늘은 그녀가 지독한 장마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라며, 반갑게 그녀의 내방을 맞이할 것이다.